훌륭한 심미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취향을 공격하는 모습을 가끔 본다. 한 편으로 취향이 강한 사람에게서 부족한 심미안을 확인하는 경우도 있다.
본디 문화란 우열의 영역이 아니고 다름의 영역이라 보는 편이 좋겠지만. 어찌됐든 심미안의 척도에 따라 공공이 인정하는 미적가치는 존재한다.
심미안적 기준에서 취향의 다름을 너그럽게 포용하면 세상만사 평화로울 터이나 불편한 사건은 종종 일어난다. 사회진화론 같은 악랄한 유사과학(?)은 그런 뿌리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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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원리를 어느정도 파악했다고 자만하는 시기가 오면 계몽적 태도가 지배적인 태도로 바뀌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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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안이 좋은 사람은 재미가 없다. 감동도 잘 받고 감성적 표현도 잘하지만 그 뿐이다. 온 몸을 내던져 빠져드는 법이 없다. 한 발치 떨어져 관조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어쩌면 미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에게는 그런 태도가 가장 연구자적 태도에 가까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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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시니컬한 척 하면 심미안이 좋은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사람의 취향은 금방 뽀록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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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아한 척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하지만 의외로 명확하지 않다. 호불호로 표현하지 않고 관심과 무관심으로 표현해서 그런 것 같다. 내 자신을 관조적 시점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잰체하는 것 같다.
잘 모르겠다.
그것이 나의 취향이다.